현대 문명과 이기의 발달로 전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으로 가까워지면서 예술과 문화의 전파속도도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외국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들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도 훨씬 쉬워지고 많아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우리그림을 만나기가 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풀과 벌레'를 주제로 한 신사임당(1504-1551)의 병풍그림을 함께 감상해보려고 합니다. 소박하면서도 정겨운 정물 그림들을 중심으로, 작가의 약력과 일화를 곁들여 소개하겠습니다. 그림감상만으로도 즐거운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잘 아시다싶이 오늘 '신사임당의 그림감상'은 그녀의 업적이나 능력에 대한 역사적인 가치나 진정성을 평가하거나 논의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다만 그녀나 시대배경, 가정환경 등 평소 생각하던 자유로운 생각을 표출하고 나누는 마당으로 활용하는 것은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추억까지 되돌려주는 정겨운 풍경
어릴 적 저희 집 마당 한 쪽 꽃밭 옆에는 어머니께서 찬거리를 위해 심어놓은 몇 그루의 가지줄기, 고춧대, 호박넝쿨 등이 무럭무럭 잘 자라곤 하였습니다. 그 옆에는 석류나 밤 열매도 익어가고, 울타리 한 구석에는 주렁주렁 매달린 연초록빛 대추열매도 빨갛게 물들어가곤 하였습니다.
이른 새벽, 그 가지줄기에 대롱대롱 이슬 머금고 익어가는 작고 여린 가지 하나를 따서 씻지도 않은 채, 그 자리에서 한 입 베어 물면 달콤하고 시원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습니다. 그 맛과 상큼한 향기나는 추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채 자라지 못한 검붉은 그 가지와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어릴 적 기억이 선명해서인지, 가지를 그린 위 그림과 꽃, 풀, 벌레 등을 그린 아래 그림은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이 무척 컸습니다. 조선시대 여류문인이자 시서(詩書)화가였던 신사임당의 그림(草蟲圖·초충도) 8점입니다.
한국적 서정과 감성, 세밀한 묘사 돋보여
아래에 보시는 것처럼, 엄격하게 말하면 풀과 벌레로만 구성된 그림은 우리 그림 가운데서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대개 채소나 과일, 꽃, 새, 나비, 곤충 등과 함께 조화를 이룬 그림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영모화(翎毛畵), 소과화(蔬果畵), 화훼화(花卉畵)라는 범주로 소개되기도 합니다.
오늘의 그림들은 <초충 8곡 병풍>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말 그대로 여덟 폭으로 된 병풍을 위한 그림입니다. 현재는 열 폭으로 꾸며져 있는데, 양 쪽 가장자리의 나머지 두 면에는 그림이 아닌 '신경'과 '오세창'의 발문(跋文)이 적혀 있습니다.
위 그림은 화면의 중앙에 곡선으로 뻗은 가지 두 줄기가 좌우 대칭으로 안정적인 구도를 잡았습니다. 줄기에 열려있는 가지의 빛깔도 곱습니다. 여기에 나비와 벌, 방아개비, 개미 등 곤충의 움직임이 생동감 있게 어우러져 있어 화폭 전체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각각의 작품들은 가지, 오이, 수박, 산차조기, 맨드라미, 원추리, 양귀비 등의 식물과 나비, 벌, 매미, 방아깨비, 사마귀, 메뚜기, 쇠똥구리, 잠자리, 하늘소, 개구리, 도마뱀, 들쥐 등과 같은 곤충이나 파충류, 즉 동물들을 아주 단순한 구도로 배치시켜 균형과 변화를 꾀하였습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오늘의 8 작품 모두 단순한 주제와 간결한 구도, 섬세하고 정감어린 구성이 신사임당 고유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더불어 단정한 채색과 풍부한 시적 정취가 매우 돋보입니다.
조선 중기의 예술가였던 신사임당은 그림뿐만 아니라, 시작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이며 경세가인 이이(李珥)의 어머니로서 사대부 부녀에게 요구되는 덕행과 재능을 겸비한 현모양처이자 어진 부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본관은 평산이며 아버지의 이름은 명화(名和)이고, 어머니는 용인이씨로 사온(思溫)의 딸입니다. 사임당은 당호(중국 고대 주나라의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 최고의 여성상)이며, 그 밖에 시임당(媤任堂), 임사재(妊思齋)라고도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임(任)'은 '태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이자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성품을 평가하는 말입니다.
1504년인 연산군 10년, 외가인 강릉 북평촌(北坪村)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아버지 명화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었으나 1519년의 기묘사화의 참화는 면하였습니다.
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중종 11년)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습니다. 서울에서 주로 생활한 아버지와는 16년 간이나 떨어져 살았으며, 아버지가 가끔 강릉에 들를 때만 만날 수 있었습니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으며 어려서부터 경문(經文)을 익히고 문장, 바느질, 자수에 능숙하였으며, 특히 시문(詩文)과 그림에도 뛰어나 여러 편의 한시(漢詩) 작품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7세 때에는 화가 안견의 그림을 본떠 그렸을 뿐만 아니라 산수화와 포도, 풀, 벌레 등을 그리는 데도 뛰어난 재주를 보였습니다.
19세에 덕수 이씨 원수(元秀)와 혼인했으며, 남편의 동의를 얻어 아들 없는 친정에 머물면서 서울 시댁과 율곡리를 내왕하며 지냈습니다. 이 때 어머니로부터 여자의 도리와 더불어 학문을 배워 부덕과 교양을 갖춘 현부로 자라납니다.
38세가 되던 해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옵니다. 이 때 사임당은 대관령 고개를 넘으며 시 한 편을 읊었는데,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어머니를 향한 마음을 달랩니다.
<대관령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 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이 시는 사임당이 38세 때 강릉 친정으로 어머님을 찾아뵙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오죽헌 쪽을 바라보면서 지은 글입니다. 어머니를 향한 그녀의 애정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는 어머니의 세계가 사임당에게 영향을 크게 미쳤음을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얼마 뒤, 선조 때부터 시집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습니다. 이따금씩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하였으며, 셋째 아들 이이도 이 때 강릉에서 낳았습니다.
이를 낳으며 꾸었던 태몽의 일화 또한 예사롭지 않습니다. 사임당이 33세 되던 이른 봄 밤, 동해에 이르니 선녀가 바닷 속으로부터 살결이 백옥 같은 옥동자를 안고 나와 부인의 품에 안겨주는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그 후 아기를 잉태하였답니다. 그 해 12월 26일 새벽에도 검은 용이 바다로 부터 날아와 부인의 침실 문머리에 머무르는 꿈을 꾸고 아기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셋째 아들 율곡이었습니다.
네 아들과 세 딸을 진정한 사랑으로 키웠고 어릴 때부터 좋은 습관을 가지도록 엄격하게 교육합니다. 사임당의 자애로운 성품과 행실을 이어 받은 칠 남매는 저마다 훌륭하게 성장하였고, 모두들 인격과 학식이 뛰어났습니다. 남편이 올바른 길을 가도록 내조하였으며, 시부모와 친정어머니를 잘 모셔 효녀로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사임당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그림은 40폭 정도인데 산수, 포도, 대나무, 매화, 풀과 벌레 등 다양한 분야의 소재를 즐겨 그리고 있습니다. 또한 안견(安堅)의 영향을 받은 그녀의 화풍은 여성 특유의 섬세함에 매우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어,한국 제일의 여류화가라는 평가를 듣습니다.
이와 관련한 일화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린 시절의 어느 날, 사임당이 꽈리나무에 메뚜기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이 와서 그림 속의 메뚜기를 쪼아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그녀의 그림은 세밀하고 사실적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실력을 함부로 자랑하지 않았다고 하며, 뛰어난 실력을 어질게 사용했습니다. 어느 날 신사임당이 잔칫집에 초대를 받았는데, 여러 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가운데 마침 국을 나르던 하녀가 한 부인의 치맛자락에 걸려 넘어지면서 그 부인의 치마를 다 젖게 했다고 합니다.
그 부인은 가난한 사람이었고, 잔치에 입고 올 옷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새 옷을 빌려 입고 왔던 터였습니다. 그런데 그 옷을 버렸으니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이 때 신사임당이 그 부인에게 치마를 잠시 벗어 달라고 했고, 그 부인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옷을 벗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신사임당은 붓을 들고 치마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치마에 얼룩져 묻어 있었던 국물 자국이 신사임당의 붓이 지나갈 때마다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되기도 하고 싱싱한 잎사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보고 있던 사람들 모두 놀랐으며 그림이 완성되자 신사임당은 치마를 내놓으며 시장에 내다 팔아 그 돈으로 새 치마를 사게 했습니다.
신사임당의 말대로 시장에 내어 치마를 파니 새 비단 치마를 몇 벌이나 살 수 있었습니다. 신사임당의 그림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으므로 그림을 사려는 사람도 많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림은 마음을 수양하는 예술이라 생각했던 사임당은 그림을 팔아 돈을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38세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서울로 떠나온 뒤로, 수진방(壽進坊:지금의 수송동(壽松洞)과 청진동(淸進洞))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그러던 1551년 여름, 남편이 수운판관(水運判官)이 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로 떠납니다. 이때 신사임당은 그리 많지 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사임당의 자녀들 가운데 그녀의 가르침과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이 셋째 아들 이이입니다. 이이는 그의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하였는데, 그는 여기에서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성품, 정결한 지조 등을 소상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현모로서의 사임당은 아들 이이를 백대의 스승으로 교육했습니다. 또한 아들 이우(李瑀)와 큰딸 이매창(李梅窓)을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워냈습니다.
이에 윤종섭(尹鍾燮)은 이이와 같은 대성인이 태어난 것은, 사임당의 태교에 있음을 시로 읊어 예찬하였습니다. 이 외에 알려진 작품으로는 "자리도(紫鯉圖)", "산수도(山水圖)", "노안도(蘆雁圖)", "연로도(蓮鷺圖)", "요안조압도(蓼岸鳥鴨圖)"와 "6폭 초서병풍" 등이 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풀과 벌레를 소재로 한 그림들 외에도 현재 채색화, 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수십 점이나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후세의 시인과 학자들은 그녀의 그림을 한결같이 극찬하고 있는데, 그윽하고 정갈하다는 평가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명종 때의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에서 그녀의 예술적 재능을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안견의 다음 간다'" 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좋은 가정 환경과 학문적인 배경에서 자란 신사임당
이와 같이, 그녀는 통찰력과 판단력이 뛰어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녀 예술가로서 대성할 특성을 지녔습니다. 뿐만 아니라 좋은 환경과 배경이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예술세계를 펼칠 수 있도록 북돋아준 것입니다.
이는 외조부의 학문에 영향을 받은 현명한 어머니의 교육과 경전이나 문집을 탐독할 수 있던 집안배경에서 기인합니다. 또한 도량 넓은 남편과 시어머니, 그리고 7세 때부터 안견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私淑)하였던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이 신사임당으로 하여금 순수한 인간 본연의 정과 사랑을 더 중요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녀의 위 예술작품 속에도 나타나 있듯이, 인간의 거짓없는 본연성을 가장 정직하면서 순수하고 자유롭게 추구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사임당은 예술인으로서의 삶뿐 아니라, 생활 속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도 성실히 감당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충실했던 여인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전체적으로 볼 때, 당대의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의 삶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런 점에서 500년이라는 시공을 뛰어 넘어 현대에서도 종종 어진 어머니 상으로 거론되는 이유일 것입니다.
위처럼, 오늘의 그림은 "풀과 벌레를 즐겨그린 화가, 신사임당(조용진, 나무숲, 2000)"과 "신사임당의 초충도그림으로 엮은 풀·벌레 이야기(김해원, 이미지프레스, 2002)"란 이름의 어린이용 그림책으로도 출간, 판매되고 있습니다. 두 책 모두 신사임당의 작품을 감상하는 즐거움과 더불어 예술가의 삶까지 느끼게 하는 전기 형식의 책으로, 신사임당의 화가로서의 삶에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겨울방학에 어린이의 감성을 자극할 만한 책으로 적극 추천합니다. 정취어린 추억과 상상력, 부드러운 감성을 깨울 수 있을 것이며, 신사임당의 정겨운 그림을 간직할 수 있는 책입니다.
'Pictures > Our Pictur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 ★ 고구려의 무덤 벽화, 해의 신과 달의 신 (8) | 2008/07/14 |
|---|---|
| ★ 잿 빛 하늘에 어울리는 파초와 국화 - 조선정조(正祖, 1752~1800) (16) | 2008/03/25 |
| ★ 봄맞이 대청소, 비좁은 방을 넓게 쓰는 방법 (25) | 2008/03/01 |
| ★ 조각보, 그 구성미와 삶의 미학 (26) | 2008/02/06 |
| ★ 강아지와 고양이, 새, 꽃 그림 - 이 암(李巖, 1499-?) (10) | 2008/02/05 |
| ★ 사마귀, 쇠똥구리, 어숭이, 마당 안 풍경의 정물화 - 신사임당 (10) | 2008/01/27 |
트랙백 주소 :: http://chohamuseum.net/trackback/10
-
Subject: ★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의 풀벌레 자수 병풍그림
Tracked from [初夏 미술관] sophia virus 2008/01/27 01:27 삭제좋은 그림들을 찾아보고, 함께 공부하고 감상하면서, 많이 안타까운 점은 국외 화가들의 작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수가 적어서인지, 우리 한국화가들의 그림은 그 가치와 평가를 제대로 못 받거나 묻혀버린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화가들의 작품을 따로 게시판을 만들어 분리해 올릴까 고민 중에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그림도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작품성과 정성을 들여다보게 되면, 사뭇 느낌이 다르며, 다시 한 번 놀라게 되는 작품입니다..
-
Subject: ★ 새 오천원권 지폐와 신사임당의 풀, 벌레그림
Tracked from [初夏 미술관] sophia virus 2008/05/27 13:56 삭제엊그제 "우리와 외국의 예쁜 지폐들"을 소개하면서 외국의 아름다운 도안과 발상을 많이 부러워하였는데, 우리의 새 지폐 도안이 미리 공개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 찾아보았습니다. 요즘도 특히 5,000원권의 위조 사례가 적쟎이 보고되고 있어, 한국은행에서 오천원 권의 도안의 시제품을 서둘러 먼저 발표한 것으로 보입니다. 위조방지 기능을 대폭 보강한 새 5, 000원권의 지폐는 1972년 처음 발행되어 1983년 이후 23년 만에 도안이 바뀌게 되는..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NDSL의 인기 게임인 '동물의숲'에 저런 이미지를 차용하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_-;
요즘 동물의숲에 빠져있는지라..ㅎㅎ
글 올리자마자 발빠른 맨큐님의 댓글이 달렸습니다. ㅎㅎ
놀랍고 감사합니다~
건강하게 교육 잘 받고 계시죠? 앞으로 못 보게 되는 거 아니예요??
우와..이 글 매 번 이렇게 쓰시는건가요? 정말 대단하세요.^o^
그림에 대해서 항상 좋은 지식 얻고 갑니다!
오리님, 요즘 이사해온 글들을 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물론 조금 더 다듬어지고 완성되어져가는 글로 채우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은 다소 걸리고 충전의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해도 여유롭게 쉬어가고 충전해가면서 역사적인 나만의 공간과 작품으로 말이지요.
물론 주제넘게도 마음만 그렇습니다. ㅋㅋ 대장님 염려처럼 작심삼일될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어렸을때 위인전으로 읽었던 신사임당에서는 몰랐던 내용들이 무척 많네요.
저는 신사임당의 그림이 저렇게 보관되어 있는지 처음알았습니다.
A2 님, 다녀가셨군요. 빼먹은 답글을 이제 확인했답니다.
따듯한 한 주 보내시길 바랍니다~~
저도 평소에 관심이 없어서 몰랐던 지식 많이 알고 갑니다.^^
러빙이님, 신사임당은 사실 널리 알려져 있죠. 그림이 그리 쉽게 볼 수 없는 것이라서 그렇지만... ^^ 즐거운 감상이었던 것이죠?
미술관에 온 듯한 기분이 드네요.^^
그래서 그런지 별로 할 말이 없어지는....-_-V ㅋㅋ
설명하는 분 따라다니면서 조용히 구경하는 관람객이 될래요.
가누다, 가누니, 가누어서, 가누고...
ㅎㅎ 조용히 무료관람하고 가신 가눔님, 여기저기 생각을 달아 의견나눠주시는 양질의 관람객 한분으로 행복한 밤입니다.
전 감기기운이 있어서... ^^ 이렇게 다녀가신 걸보면, 강건하신거죠?